저 개인에게도 물론 영광이지만, 과학소설이 김유정문학상을 받는 장면 또한 몹시 뜻 깊은 사건이라 생각합니다.
굳이 따지자면 이 소설은 아마도 쥘 베른 스타일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사변소설의 모범을 창조했으나 과학기술 측면에서는 큰 틀의 내적논리를 준수하는 데 그친 허버트 웰즈에 비해, 쥘 베른은 구체적으로 실현가능한 메커니즘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때문에 실제로 우리 삶의 일부가 된 것은 웰즈의 우주전쟁이나 타임머신이나 투명인간이 아니라 베른의 달나라 여행, 해저 탐험, 80일간의 세계일주입니다.
후대의 작가로서, 당연하게도 저는 둘의 장점을 모두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고민이 거듭될수록 한 이야기 안에 이 두 거인을 병치한다는 게 지나친 욕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이쪽이든 저쪽이든 하나 골라 집중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에 대한 충실한 소개가 아니라 그로써 야기되는 어떤 의미심장한 사건이라고 늘 생각해왔던 터여서, 고지식한 베른보다 몽상가인 웰즈의 방식을 두세 배는 따뜻하게 만지작거렸습니다.
하지만 끝내 웰즈만큼 대범해질 수 없었습니다. 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단계마다 저는 그것이 정말 가능한지 고민하고 확인하느라 신경질을 부렸고, 그러는 동안 이 소설에 담겼어야 할 낭만의 상당량을 분실하고 말았습니다. 쥘 베른이 보다 훌륭한 작가로 성장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았던 바로 그 좌뇌의 유령에게 저 역시 발목을 잡혔던 것입니다.
게다가 현재의 과학 수준은 쥘 베른 시대의 과학 수준보다 훨씬 전문적이고 복잡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외삽한 미래의 모습도 쥘 베른이 상상한 미래의 모습보다 훨씬 전문적이고 복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오늘날 과학소설이 사건의 발생가능성을 정직하게 설득하려면 독자를 좀 고문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책을 한 권이라도 더 팔아야 할 제 입장에서는 꽤 난처한 일입니다.
그래도 이대로 열심히 가다보면, 언젠가는 두 선배 사이에서 그럴듯한 접점을 찾아내리라고 별 근거 없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때 이 상을 한 번 더 주시면 고맙게 받겠습니다.
2016년 여름
지난해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 갔다. 청명한 하늘로 이름난 고장이었다. 내가 머물던 보발롱 거리에서는 세잔의 작업실이 지척이었고, 눈부신 생빅투아르산도 손에 잡힐 듯 보였다. (……) 하지만 그 많은 낭만 중 어느 하나도 잡지 못했다. (……) 10월 중순, 그리고 마침내 탈고한 건 다시 그로부터 한 달도 더 뒤의 일이었다. (……) 엑상프로방스의 황금 계절에 영영 돌아오지 않을 내 여유로운 시간까지 덤으로 얹어 이 소설 한 편과 바꿨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길 빈다.
동남아를 여행하던 중에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그럭저럭 소설이 될 것 같아 '지아'라는 멋들어진 제목을 붙여놓았다. 그녀가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머릿속에 떠돌던 장면들이 차츰 연결되어 종이에 내려앉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꿈꾸던 소설이 지아가 아니라 그녀가 머물렀던 어느 거리의 이야기며, 분량도 예상보다 훨씬 방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 내게는 돈과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며칠 궁리를 한 끝에 앞뒤로 탁탁 잘라, 지아가 떠난 직후부터 라노의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만 남겨두었다. 그들 삼대에 걸친 소이 식스틴의 주옥같은 연대기는 이담에 누군가, 돈도 많고 시간도 많은 분께서 써주실 것이다. 얍삽하게 벌써 쓰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중국 광둥의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매달 한두 차례 방콕으로 날아갔다. 그들의 옷을 입고, 그들의 음식을 먹었다. 입을 가만히 두지 않는 현지 친구들도 많이 만났다. 그러는 과정에서 이야기가 재차 길어졌다. 등장인물 또한 점점 늘어났다. 자료는 벌써 충분했지만, 어쩐지 멈출 수가 없었다. 돈과 시간과 머리숱이 빠르게 줄어들어 갔다. 확신이 부족한 소설가들만 공격하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모양이었다. 우연찮게 ‘선택’에 대한 모종의 깨달음을 얻지 않았더라면, 나는 평생 이 책을 탈고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원히 소이 식스틴에 자빠져 있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칼을 빼 휘둘렀다. 까이와 빠빠의 비중을 줄이고 우웨와 유하의 사연을 삽화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욘의 여동생도, 아팡의 외삼촌도 살살 타일러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골든트라이앵글의 마약왕 쿤사와 관련해 모아 놓은 신문 기사들은 염소에게 먹이로 드렸다. 아마 우연이겠지만, 그날 저녁 뉴스에서 쿤사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월 말의 일이었다.
이듬해 여름이 되어 강의 계약이 끝나자 곧바로 태국에 가 숙소를 잡았다. 멍석을 펴고 열나게 써댔다. 일곱 달에 걸친 그 기간은, 내가 뭔가에 집중하여 매일 규칙적으로 작업을 한 인생의 첫 번째 사례에 해당한다.
귀국한 건 2009년 초였다. 삼 년 가까이 비워뒀던 아파트엔 먼지가 건초처럼 쌓여 있었다. 그 폭신한 방석에 올라 초고를 수정했다. 발로 썼거나 악마가 낙서해놓은 부분을 지웠다. 그러다 지치면 열대에 부려놓은 추억과 누락된 사연들이 떠올라 멍하니 침을 흘렸다. 이 책은 많은 타액 속에서 피어났다.
하지만 이 책은 타액이 아니라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의 인생은 그간 살아오며 내린 결정과 더불어 우리가 내리지 않았던, 혹은 내릴 수 없었던 결정들에도 넉살좋게 빚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선택에서 소외된 적이 없었고, 흘러간 모든 시간들은 우리 스스로가 의도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사춘기 때 집중적으로 저지른 무수한 착오와 실수들을 통해 배웠다. 개중 어떤 건 꽤 심각해서, 아직까지 사지 멀쩡히 살아 있는 게 기적이다.
한편으로 이 책은 여행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항상 어디론가 떠나고 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온 우리가 떠날 때의 우리가 아니듯, 돌아온 곳도 떠날 때의 그 곳이 아니다. 우리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여행을 매순간 치러내며 살고 있다. 그 무정한 비가역성에 주목했다.
이 책은 또한 세속에 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도덕군자나 범죄자가 아니라 이웃에 관한 이야기다. 편집자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의 수가 이리 많은 건, 일단 인연이 얽혀버린 내 거지같은 친구들을 무대에서 완전히 철회하는 게 쉽지 않았던 까닭이다. 누구든 자르려 마음만 먹으면 그날 밤 꿈에 나타나 개판을 쳤다. 도저히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어떤 면에서 이 책은 범신론자들의 나침반인 우연과 조화에 관한 이야기다. 모든 것이 자유롭다는 생각의 일부에는 모든 것이 다스려진다는 생각의 일부가 매달려 있다. 둘은 그런 식으로 이어져 있다. 우연과 조화가 시공을 초월해 소통할 때, 거기에서는 콴이 제 인생의 반에 걸쳐 들었던 천둥 같은 총소리가 난다. 탕!
비슷한 이유에서 이 책은 부분과 전체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아주 제한된 어떤 지역에 집중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들여다본 그 좁은 곳에 우리의 장엄한 은하가 통째로 담겨 있었다. 그로 인해 내가 느낀 현기증을 당신은 이 책 어디쯤에선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을 쓰는 내내, 반드시 넣었어야 할 문장 하나를 빼먹었다는 더러운 꿈에 시달렸다. 그래서 위태롭기 짝이 없는 구조물이며, 언젠간 와르르 무너지고 말리라는 예감에 불안해했다. 그 악몽이 현실이 되었는지 어쩐지 나는 모르겠다. 알아도 이젠 어쩔 도리가 없다. 1994년부터 2009년 사이의 수쿰빗 소이 식스틴에 관하여 내 기력은 이미 소진되었다. 책에 미처 쓰지 못한 말이 있다면, 혹은 실수로 남겨진 부분이 있다면, 그에 대해서는 독자의 지혜를 바란다.
당신의 영혼은 처음부터 이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혼돈의 형태였다. 당신이 이 책을 구입하기 위해 지불한 돈은, 그 혼돈에 일련의 질서를 부여한 내 노동의 대가다.
2010년 5월
이렇게, 여덟 편이다. 이것들이 나라는 인간이 보낸 지난 삼년의 세월이다. 세상의 어떤 과오는 아무리 싹싹 빌어도 돌이킬 수가 없으니, 차라리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양 태연하게 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러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뻔뻔한 마음가짐이 첫번째 소설집을 낼 때와 지금과의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나는 현자(賢者)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자정의 픽션>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내가 생각하는 '자정'이란 가라타니 고진이 그리워하는 '요란했던 근대' 이후의 시간이다. 동시에 서사문학이라는 대가족 안에서 소설이 태동하던, 태아처럼 웅크린 채 자신의 미래에 대해 홀로 자문해보던 근대 이전의 저 먼 '새벽'을 의미하기도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정'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얕은 꿈을 꾸거나 혹은 잠을 이루지 못해 고단하게 중얼거리는 시간이다.
어느 쪽이든, 아침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돌이켜보면 나는 항상 어딘가에 갇혀 있었다. 어딘가에 갇혀, 밑도 끝도 없는 초조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슬슬 이 도박장의 규칙에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난 여전히 잊거나 혹은 잃기만 한다. 이미 많은 것을 잃었다.
무엇 하나 기대할 수 없는 패를 들고 지난 3년을 버텨왔다. 자금은 오래전에 바닥이 났는데, 더 배짱을 부리려면 뒷주머니에 숨겨놓은 차비마저 태연한 낯으로 내놓아야 할 판이다. 알거지가 되어 터벅터벅 돌아갈 멀고먼 거리를 헤아릴 때, 당신은 테이블 맞은편에서 고개를 들고는 오호라 그게 전부였구나, 그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여기까지 따라왔구나 하며 나를 꾸짖을 셈인가. 애써 무시하려 해도, 뼛속까지 훑는 듯한 그 시선에 자꾸만 고개가 숙여진다. 천연덕스럽게 너스레를 떨지도 못하고, 훌훌 털며 사내답게 일어서지도 못하고, 이건 전부 사기라며 울부짖지도 못하고, 요놈의 손모가지를 뎅겅 잘라버리지도 못하고, 아아 어찌하여 나는 이 빌어먹을 패를 확 내던지지도 못하고.
이제, 부끄러운 내 첫 패를 당신 앞에 늘어놓는다. 그러니 어서 이 패를 다시 섞으라. 부디 나에게도 무언가 좋은 것이 들어오도록.
죽어 신(神) 앞에 섰을 때
작가는 그간 탈고한 모든 글을 소명해야 한다.
그 노역에 이 책이 더해졌다.
2006년 겨울부터 2010년 겨울까지의 단편들을 묶었다.
오래 버틸 질문도 있을 거고, 훨훨 증발할 농담도 있을 거다.
업둥이 같은 공상도 있을 테고, 너덜거리는 훈수도 있을 거다.
돌아볼 마음 따위는 없다. 부끄럽지 않다.
여기 실린 이야기 하나하나가 전부 나다.
내 손으로 썼다.
2011년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