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마음의 청결》을 출간함으로 1847년에 출판된 키르케고르의 작품 《다양한 정신의 건덕적 강화》 전체 3부 작품을 완역하였습니다. 1부 《마음의 청결》, 2부 《새와 백합에게 배우라》, 마지막 3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입니다. 1부의 원제목은 “En Leiligheds-Tale”로, 우리말로 옮기면, “특별한 때를 위한 강화” 정도로 옮길 수 있습니다. 즉, 이 말은 결혼식, 장례식, 고해성사 등 특별한 경우에 행하는 교회의 설교를 가리키는 말합니다. 여기에는 교회 기념일, 정치 행사, 혹은 축하 행사 등에서의 설교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청결》은 이 중에서 특별히 ‘고백의 때’와 관계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정신의 건덕적 강화》의 전체 3부는 서로 깊은 관련이 있기에, 꼭 함께 읽기를 추천해 드립니다. 키르케고르의 일기를 참고하면, 1부 《마음의 청결》은 윤리적이고도 아이러니컬하며, 그리하여 건덕적이며 소크라테스적입니다. 반면 2부 《새와 백합에게 배우라》는 유머러스합니다. 3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각 작품에 그 책을 다음 책과 연결하는 하나의 가시를 남겨놓는다고 말합니다. 가시는 무언가를 찌르는 것입니다. 키르케고르가 각 사람의 덕을 세우기 위해, 마치 ‘독침’ 같은 무언가를 각 강화에 숨겨놓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다양한 정신의 건덕적 강화》는 상호 관련성이 있습니다.
키르케고르는 《마음의 청결》을 ‘단독자’에게 바치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이 책은 단독자와 관련된 작품이지만, 마지막 시리즈인 3장까지 끝까지 읽지 않는 한, 이 글이 단독자에 관한 이야기임을 독자가 분명하게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일기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단독자’는 키르케고르가 생각하기에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로서, 착각으로서의 차이를 완전히 폐지하고 영원의 본질적 평등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또한, 가장 아이러니한 범주가 ‘단독자’라고도 말합니다. 이 작품의 3부는 특별히 단독자를 심층 깊이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무엇보다 ‘다양한 정신’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갑니다. 야고보 사도가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청결하게 하라.”(약 4:8)고 경고한 것처럼, 두 마음이 아닌 한마음을 품는 것이 과연 무엇이고, 또한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키르케고르는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룹니다. 마음의 청결이란 사람이 오직 한가지만을 마음에 품는 것이라고 키르케고르가 말한 것처럼, 이 책을 읽는 모든 분께서 한가지, 즉 청결한 마음을 품으시길 축복합니다.
『이방인의 염려』는 그 당시 기독교를 비판한 작품이다. 그냥 읽는다면 특별히 비판적인 요소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을 알고 나면 이해하는 데 조금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그 당시에 덴마크는 기독교 국가였다. 국가로부터 핍박을 받아야 했던 초대 교회 당시 상황에서 완전히 역전된 것으로, 전체 사회가, 전체 국가가 “기독교화”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기독교 세계 에서 이방인의 염려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들어가는 말>에 보면, “이 나라에서 사람들 사이에 이런 이방인의 염려들이 발견된다. 따라서 이 기독교의 나라는 이방인의 나라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방인은 누구인가? 이방인은 기독교 세계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기독교 세계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을 일컫는다. 다시 말해, 교회 안에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보이는 이방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이방인의 특징은 자칭 그리스도인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키르케고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는 이방인들을 각성시키고자 기획된 것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가장 불쌍한 자는 누구인가? 이 강화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에 살면서 이방인의 염려를 구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모르고 살아가는 저 기독교 밖에 있는 이방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반면, 기독교 세계에 사는 이방인은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가능성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키르케고르는 이 사람들을 각성시켜야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각성시킬 것인가? 드디어 가장 어려운 주제에 들어왔다. 사실, 사람들의 마음에 갖고 있는 근본적인 신념 혹은 이념을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세상에서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 다투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 이야기, 종교 이야기 하지 말라고 충고하지 않던가!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정신과 의사도 다룰 수 없고, 심지어는 부모도 불가능하다. 인간이야 단지 기도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한 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복음의 명령대로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를 보라는 것이다.
도대체 왜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가? 거기에서만, 오직 그곳에서만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투명성의 문제는 이미 1847년 『다양한 정신의 건덕적 강화』 2 부의 작품인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에게서 우리가 무엇을 배우는가?”에서 언급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병』 2부에서도 인간이 오직 “하나님 앞에 서” 투명해질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세상은 너무 혼탁하다.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특별한 존재인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게 하고 타인과 비교하게 함으로써 혼란에 빠지게 한다.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방인 을 각성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전(全) 존재가 투명하게 드러나는 곳으로 인도해야 한다. 바로 이 곳이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인간의 비교의식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타인과 비교함으로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새와 백합에 비교함으로써 “존재하기”를 진정으로 시작하게 된다.
나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키르케고르가 말한 이런 경건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대에 이르렀다고 생각 한다. 우리는 지금 “초연결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과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과 사물, 사물과 사람도 연결하는 시대가 되었다. 모든 것을 연결하는 이런 시대에 오직 단 한 분, 하나님만은 예외다.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과 함께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 시대에 인간의 존재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명쾌하게 제시하기가 더 힘들다. 인간은 관계하는 존재라고 규정을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만 나의 전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 맞다면, 하나님 을 제외한 이런 연결, 이런 교제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직 존재가 규정되지 않은, “존재하기”를 시작조차 하지 못한 상태다.
새와 백합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존재하는 것에 어떤 어려움도 없다. 새와 백합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재하기를 시작한다. 시작하기 위한 예비적 단계도 필요 없다. 하지만 사람은 어떠한가? 시작의 어려움이 존재 한다. 존재하기를 시작하는 지점부터 인간은 시험을 받는다는 점에서 새의 존재와 다르다. 이 문제는 “비교”에 있다. 가난한 것과 부한 것, 비천한 것과 고귀한 것과 같은 비교 때문에 존재하기가 힘들다.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기도 전에 내가 얼마나 비천한지 혹은 고귀한지, 내가 얼마나 부한지 혹은 가난한지를 먼저 배운다. 이것이 시작의 어려움이다. 존재하기, 태어나자마자 존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가난한 사람, 비천한 사람은 마치 부한 자, 고귀한 자가 얼마나 부자이고 고귀한지를 입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그들의 인생은 이런 자들을 위해 이용되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반면, 부한 자, 고귀한 자는 가난한 자와 비천한 자들의 존재로 인해 그들의 가치, 그들의 명성과 명예가 더욱 높아질 것처럼 보인다.
간단히 언급했지만,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기도 전에 우리는 이런 인간적인 비교의 늪에 빠져 좀처럼 헤쳐 나오기가 힘든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이것을 먼저 깨닫기 위해서 우리가 저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가 있는 곳으로 가보자. 그 곳에는 어떤 인간적인 비교도 들어올 수 없다. 복음의 명령대로,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를 보자. 그리하여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바로 알 수 있도록 새와 백합과 우리 자신을 비교해보자.
역자로서 『이방인의 염려』에서 제시한 모든 것을 다 말할 수는 없다. 이 해제는 이 강화의 특징을 다만 역자의 관점에서 서술했을 뿐이다. 이 강화는 얼마든지 다른 관점에서도 해석될 수 있다. 독자 여러분 나름대로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면 더욱 좋다.
기독교 출판 시장이 어렵다. 아마 갈수록 더 어려워질 것으로 판단된다. 책을 내고 싶어도 선뜻 나서는 출판사가 없었기에 직접 1인 출판에 도전했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이라 출판비용이 얼마 들지 않는 전자책 먼저 출간을 했고, 이제야 종이책으로 출간한다. 아직 출판에 대한 경험이 없는 초보 출판이라 부족한 점이 많더라도 독자들의 많은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독자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후원, 기도를 부탁드린다.
『이방인의 염려』는 그 당시 기독교를 비판한 작품입니다. 그냥 읽는다면 특별히 비판적인 요소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을 알고 나면 이해하는 데 조금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당시에 덴마크는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국가로부터 핍박을 받아야 했던 초대 교회 당시 상황에서 완전히 역전된 것으로, 전체 사회가, 전체 국가가 ‘기독교화’된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기독교 세계에서 이방인의 염려가 발견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프롤로그>에 보면, “이 나라에서 사람들 사이에 이런 이방인의 염려들이 발견됩니다. 따라서 이 기독교의 나라는 이방인의 나라입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방인은 누구일까요? 이방인은 기독교 세계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기독교 세계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을 일컫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 안에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보이는 이방인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이방인의 특징은 자칭 그리스도인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키르케고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는 이방인들을 각성시키고자 기획된 것으로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가장 불쌍한 자는 누구인가요? 이 강화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에 살면서 이방인의 염려를 구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모르고 살아가는 저 기독교 밖에 있는 이방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반면, 기독교 세계에 사는 이방인은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가능성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키르케고르는 이 사람들을 각성시켜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각성시킬 수 있습니까? 드디어 가장 어려운 주제에 들어왔습니다. 사실, 사람들의 마음에 갖고 있는 근본적인 신념 혹은 이념을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세상에서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 다투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 이야기, 종교 이야기 하지 말라고 충고하지 않던가요!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정신과 의사도 다룰 수 없고, 심지어는 부모도 불가능합니다. 인간이야 단지 기도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한 가지 방법을 제안합니다. 복음의 명령대로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를 보라는 것입니다. 각성을 위해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를 보라고? 아마 ‘쌩뚱’맞은 결론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독자들은, 키르케고르에게 있어서 산상수훈 및 이와 관련된 마태복음 6장이 아주 중요한 장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와 관련된 마태복음 6장은 인간의 근본적인 실존 문제와 관련이 깊습니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그의 작품 『불안의 개념』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쌩뚱맞은 결론은 한 마디로 말해, 복음 자신이 그런 쌩뚱맞은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일종의 ‘하나님 나라의 윤리’입니다. 마태복음 5장을 깊이 있게 읽고 있노라면, 아마 이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율법은 지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율법보다 더 엄격합니다. 게다가, 5장 마지막 절은 더 충격적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의 완전(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온전)하라.”
마태복음 5장은 우리가 닮아야 할 모범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제시하고 있는 반면, 6장은 새와 백합이 우리의 모범입니다. 그래서 나는 복음이 쌩뚱맞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갑작스런 변화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 아버지의 완전하심을 본받아야 하는 우리가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를 봐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 부분에 대하여는 크게 두 가지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첫째, 관대함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아버지의 완전하심을 닮으려면 가랑이가 찢어집니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다가 가랑이가 찢어지는 꼴입니다. 과연 누가 마태복음 5장을 실천할 수 있으며, 하나님 아버지를 닮을 수 있겠습니까!
가끔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시는 장면은 성경에 나오는데 왜 웃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가라고 불평합니다. 이런 불평은 아마도 말씀의 맥락을 잘 파악하지 못해서 나온 결론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처음부터 자신이 어떤 죽음을 맞이할지 알고 계셨던 분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자신을 닮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 일인지도 다 알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이 끔찍한 현장을 조금이라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왜 웃지 않는지를 질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과 6장의 사이에서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면 인간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나를 봐. 그리고 철저하게 나를 닮아야 해. 산상수훈에 나오는 모든 것을 다 지켜야 완전해질 수 있거든.”
인간은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다가 가랑이가 찢어지는 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지 말고, 저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를 보렴.”
인간이 가랑이가 찢어지지 않도록, 주님은 다른 모범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바로 새와 백합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관대함입니다. 나는 산상수훈이 인간이 지킬 수 있는 윤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 해도 복음의 일점일획도 건드리거나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다음에 나누겠습니다. 어쨌든, 복음은 우리에게 새와 백합을 모범으로 제시하면서 그만큼 부드러워진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관대함입니다.
둘째, 투명성입니다. 키르케고르의 사상에서 중요한 개념 중에 하나가 바로 투명성입니다. 이 단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많이 등장하는데, 인간은 오직 하나님 앞에 섰을 때만 투명해질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논하기 위해, 다시 서두에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에 빠진 이방인을 각성시키려 했습니다. 이 과업을 이루기 위해 다시 한 번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를 제시합니다.
도대체 왜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가요? 거기에서만, 오직 그곳에서만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투명성의 문제는 이미 1847년 『다양한 정신의 건덕적 강화』 2부의 작품인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에게서 우리가 무엇을 배우는가?”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병』 2부에서도 인간이 오직 ‘하나님 앞에서’ 투명해질 수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세상은 너무 혼탁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특별한 존재인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게 하고 타인과 비교하게 함으로써 혼란에 빠지게 합니다.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방인을 각성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전(全) 존재가 투명하게 드러나는 곳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바로 이 곳이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가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인간의 비교의식이 접근할 수 없는 곳입니다. 이곳에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타인과 비교함으로 혼란에 빠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와 백합에 비교함으로써 ‘존재하기’를 진정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나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키르케고르가 말한 이런 경건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대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초 연결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과 사물, 사물과 사람도 연결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연결하는 이런 시대에 오직 단 한 분, 하나님만은 예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과 함께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 인간의 존재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명쾌하게 제시하기가 더 힘듭니다. 인간은 관계하는 존재라고 규정을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만 나의 전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 맞다면, 하나님을 제외한 이런 연결, 이런 교제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아직 존재가 규정되지 않은, ‘존재하기’를 시작조차 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새와 백합은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존재하는 것에 어떤 어려움도 없습니다. 새와 백합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존재하기를 시작합니다. 시작하기 위한 예비적 단계도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어떻습니까? 시작의 어려움이 존재합니다. 존재하기를 시작하는 지점부터 인간은 시험을 받는다는 점에서 새의 존재와 다릅니다. 이 문제는 ‘비교’에 있습니다. 가난한 것과 부한 것, 비천한 것과 고귀한 것과 같은 비교 때문에 존재하기가 힘듭니다.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기도 전에 내가 얼마나 비천한지 혹은 고귀한지, 내가 얼마나 부한지 혹은 가난한지를 먼저 배웁니다. 이것이 시작의 어려움입니다. 존재하기, 태어나자마자 존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요! 가난한 사람, 비천한 사람은 마치 부한 자, 고귀한 자가 얼마나 부자이고 고귀한지를 입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그들의 인생은 이런 자들을 위해 이용되어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반면, 부한 자, 고귀한 자는 가난한 자와 비천한 자들의 존재로 인해 그들의 가치, 그들의 명성과 명예가 더욱 높아질 것처럼 보입니다.
간단히 언급했지만,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기도 전에 우리는 이런 인간적인 비교의 늪에 빠져 좀처럼 헤쳐 나오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이것을 먼저 깨닫기 위해서 우리가 저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가 있는 곳으로 가봅시다. 그 곳에는 어떤 인간적인 비교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복음의 명령대로,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를 봅시다. 그리하여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바로 알 수 있도록 새와 백합과 우리 자신을 비교해 봅시다.
이 강화 전체는 한 마디로 말한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제시입니다. 기독교 존재론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삶에 근본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실존의 구조로서 불안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키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키르케고르는 불안을 원죄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불안은 어떤 병적인 불안, 정신과에서 말하는 예기불안과 같은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인간의 삶에서 결코 제거할 수 없는 불안으로 ‘존재론적 불안’이다.
따라서 이 불안을 제거하려는 어떤 노력과 시도도 헛됩니다. 왜냐하면 제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불안을 어떻게 상대하느냐에 따라 믿음에 이를 수도 있고, 죄에 빠질 수도 있는 그런 양의성이 있는 것이 불안입니다. 다시 말해, 악을 행하려 할 때도 불안은 나타나고 역시 선을 행할 때에도 불안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불안은 대상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두려움 혹은 공포는 대상의 문제인 반면, 이 존재론적 불안은 대상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능성으로부터 옵니다. 두려움은 대상이 사라짐과 함께 사라지지만 불안은 가능성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자유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인 인간에게서 불안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이 불안은 정신 혹은 영으로 규정되지 않는 동물에서는 전혀 발견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기분입니다.
키르케고르는 제1강화의 “가난의 염려”에서 “구원이란 명령받은 것, 곧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나는 여기에서 구원은 곧 불안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확신합니다. 키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을 우리나라 말로 ‘불안’이라고 번역했으나 성서적인 의미에서 고찰한다면 이는 곧 염려를 의미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삶의 불안, 염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서 참다운 자기 자신을 깨닫고 믿음으로 전진할 때, 염려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날마다 구원’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내일 다만 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아마도 사탄이 제일 좋아하는 기도가 ‘내일’ 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오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듯, ‘오늘’ 다만 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오늘’ 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해야 하고, 내일은 다시 오늘이 될 것이므로, 날마다 기도하지 않는 한 우리는 악에서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다 설명하지는 않았으나, 키르케고르는 『불안의 개념』에서 원죄의 전제이자 원죄를 역행적으로 설명해주는 불안에 대해 말한 바 있습니다. 최초의 죄를 낳기 전에 불안(염려)이 존재했다는 것은 놀라운 통찰입니다. 이 불안을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따라 아브라함처럼 믿음에 이를 수도 있고 아담처럼 죄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악이란 대단한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거스틴St. Augustine이 악을 존재의 결핍으로 보았다면, 내일의 불안, 내일의 염려를 제거해달라는 기도는 여전히 존재가 결핍된 상태요, 불안을 극복했다기보다는 ‘내일의 불안으로 인한 기도’일 뿐입니다. 이런 기도가 어떻게 불안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이런 기도는 복음이 말하는 염려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나는 이런 기도는 자신의 내밀한 존재의 결핍을 스스로 폭로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새와 백합처럼 ‘존재’하기는 더욱 힘들 것입니다. 그들은 내일의 염려가 없으니까요.
‘오늘’ 다만 악에서 구원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때, 그 날 하루는 염려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다시 내일은 오늘이 될 것이고, 그 한 날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날마다 구원받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날마다 염려로부터 구원받는 비결입니다. 밀란 쿤데라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소설을 썼다면, 여기에서 느끼는 존재란 “형용할 수 없는 존재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역자로서 『이방인의 염려』에서 제시한 모든 것을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해제는 이 강화의 특징을 다만 역자의 관점에서 서술했을 뿐입니다. 이 강화는 얼마든지 다른 관점에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나름대로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면 더욱 좋습니다.
기독교 출판 시장이 어렵습니다. 아마 갈수록 더 어려워질 것으로 판단됩니다. 책을 내고 싶어도 선뜻 나서는 출판사가 없었기에 직접 1인 출판에 도전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이라 출판비용이 얼마 들지 않는 전자책 먼저 출간을 했고, 이제야 종이책으로 출간합니다. 아직 출판에 대한 경험이 없는 초보 출판이라 부족한 점이 많더라도 독자들의 많은 양해를 구하는 바입니다. 독자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후원,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제목부터 참 도발적인 책이 있습니다. 《목사, 장로가 변해야 교회가 살고, 교회가 변해야 나라에 평화가 온다》 라는 신간입니다. 물론, 이것은 부제이고, 원제목은 《천국 독립군》이긴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책이나 영화의 제목에서 부제가 붙은 경우에, 작가나 감독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을 부제로 돌려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다들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책은, 순복음 교회인 여수 은현교회 은퇴 목사인 김정명 목사를, 한국의 키르케고르 전문가인 이창우 카리스 교회 목사가 인터뷰한 내용을 책으로 출간한 것입니다. 김정명 목사는 1970년대 초반부터 목회를 시작하셨는데, 그때로 말하자면 대한민국에 교회를 한 번도 안 가 본 사람은 없을 정도로 교회가 부흥했습니다. 주일 학교 학생들도 많았고요. 성탄절이면 평소에 교회를 안 나가던 사람들도 교회에 가서 함께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전 세계적으로 만 3년을 휩쓸고 지나간 코로나 이후 시대는 더 말할 것도 없이, 교회는 지금 세상에서 대표적인 혐오 시설로 여기는 곳이 되었습니다. ‘개독교’니 ‘먹사’니 이런 말들이 심심찮게 들려오기 시작하게 한 일련의 기독교 관련 사건들이, 이제는 거의 온 국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러면 그렇지.”라는 말을 교회를 향해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공식적으로 종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코로나 전에는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도, 이제는 코로나 핑계를 대고 결국 지금은 거의 다니지 않습니다. 그나마 집에서 유튜브를 통해 예배 실황을 보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많이 참아오면서 꾹꾹 눌러왔던, “내가 왜 이런 꼴을 더 봐야 해? 내가 왜 이런 억울한 일을 더 당해야 해?”란 감정들이 이제는 “역시 하나님은 없어. 정말 있다면 사람들이 이럴 수 있나? 목사가? 장로가? 권사가? 어떻게?”, “그만 봐도 돼, 그만 참아도 돼, 이 정도면 됐어.” 란 생각으로 시작되어, 결국 “안. 나. 가” 라는 행동의 방식으로 표출이 된 시대까지, 한 세대의 교체와 상실을 지켜보셨던 김정명 목사가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결국 지금의 이 상황을 불러온 한국 교회와 직분자들에게 책을 통해 쓴 소리를 하시기에 이른 것입니다.
편집자인 저조차도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다녀온 수많은 세월동안 교회 안에서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여타의 다른 교인분들에게 부지기수로 많은 상처를 받아 왔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상처를 준 분 들이라고 한다면, 목사, 부목사, 전도사, 장로, 권사와 같은 직분자들이었고요, 학교에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선생님들과 친구들, 회사에서는 예수 믿는다는 상사나 동료들이었습니다. 가족이나 친척들 가운데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지요. 물론 저부터도 저 자신도 모르게,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말로 혹은 행동으로 상처를 주었을 것임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막 9:42, 눅 17:2)”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실족하게 하는 자에 대해서 정말 무서운 경고를 날리고 계십니다. 내가 남에게 실족케 한 것보다는 그래도 내가 당한 것이 많다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고 어느 정도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형제자매에게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들이 내 자신에게부터 허다할 일입니다. 어디 저 뿐이겠습니까? 대한민국에서, 나아가 전 세계에서 교회 안에서 상처받았다 하면, 이것은 아마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이 책은 당장 부제부터, 이 얼마나 우리 속을 통쾌하고 시원하게 해 주고 있습니까? 반면에, 제목에 이름이 들어가 있으신 목사님, 장로님들은 또 얼마나 기분이 나쁠 일입니까? 표지만 보고도 이미 빈정이 많이 상하셔서 이 책을 비난해 버리고 읽어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으시거나, 나아가서는 불매 운동까지 벌이시진 않을까 조금 걱정도 되긴 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0장 29절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신다면, 이 땅 가운데 단 하나의 사소한 일조차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이런 의미에서, 김정명 목사가 지금 이 시대에 다른 목사님들, 장로님들, 교회 직분자들을 꾸짖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가 모든 성도에게 사랑으로 권면하는, 두 개의 성경 말씀을 올려 드리면서 책 소개를 이만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데살로니가전서 2: 11~12).”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야고보서 1:21).”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자기 시험을 위하여』와 『스스로 판단하라』는 1851년에 원고가 완성되었으나, 『스스로 판단하라』는 출판을 미루다가 1876년에 유고집으로 출판되었다. 두 저서의 공통점은 당시 “세속화된 루터교”를 비판하고 “진정한 기독교”를 변호했다는 점이다. 두 저서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제자도 혹은 본받음이다._ 옮긴이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