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처럼 깊은 꿈을 안겨 주는 말은 없다. 우리가 자라난 곳이 어머니의 품이라면, 고향은 어머니나 아버지까지를 포함한 더욱더 큰 품이랄 수 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데에는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구별이 없고, 늙은 사람도 젊은 사람도 차이가 없다. 떠난 지가 오랜 사람이면 오랜 사람일수록, 떠나 있는 곳이 먼 사람이면 먼 사람일수록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간절하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어머니가 이 세상에선 제일 좋은 사람으로 생각되듯이 제가 난 고향은 언제나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곳이란 자랑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내가 태어난 고향은 남쪽나라 경상도 중에서도 산골 고을인 합천 땅이다. 우리 나라 국보 팔만대장경이 있는 곳이라면, "으응 합천 해인사?" 하고 그제야 겨우 고개를 끄덕일까 말까 한 그런 시골이지만, 그러나 내게 있어서는 어떤 번화한 남의 고향보다도 정다운 곳이다.
나는 이 정답고 아름다운 고향을 길이길이 내 가슴속에 간직해 두기 위해서 허다하게 그림으로도 그렸고 노래로도 불렀고 또 이렇게 소설로도 써본 터이다.
그러나 이것이 꼭 내 고향인 것은 아니다. 한국이면 어디서라도 있음직한 고향일 뿐이다. 이야기 가운데에 나오는 인물들도 꼭 내 고향 사람들은 아니다. 한국이면 어느 지방, 어느 곳에서도 만날 수 있는 그런 친한 사람들일 뿐이다. 지나고 보면 모두가 정든 사람들뿐! 그때는 밉고 무섭고 더러운 인간들이었다 하더라도 지금 와선 모두가 그리운 사람들이 된다. 기쁜 일도 즐거운 일도 많았지만 또 한편 슬픈 일도 눈물 나는 일도 많았던 곳이 고향이다.
나는 그 기쁨과 슬픔을 모두 그리움의 양식으로 삼아 놓기 위해서 이 소설을 엮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독립 만세의 불길이 온 삼천리 강산을 태웠던 먼 옛날의 역사 앨범의 한 장면이 되는 셈이다.
벌써 육십여 년이 지나간 그 세월, 나는 지금의 여러분들과 같은 열살 남짓의 어린 소년이었다. 어쩌면 나도 이 소설 속 어느 한구석에 끼여 있을지 모른다.
이 소설은 약 삼십년 전에 쓴 작품임을 함께 밝혀 둔다.
1981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