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철만 되면 섬에 버려지는 강아지와 고양이가 는다고 합니다. 그런 기사를 읽을 때면 마음이 아픈 것을 넘어 환멸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귀여울 때 데려와 키우다가 귀찮아지면 버리는 것입니다. 마치 물건처럼요. 생명과 물건은 같을까요? 다를까요? 이런 의문이 「빗자루는 하나뿐」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맹탐정과 주변 인물들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맹탐정은 스스로 혹은 남들이 탐정이라 부르면 부끄러워하지만 탐정 일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보수 때문일 수도 있고 이웃에 대한 애정 때문일 수도 있죠. 제 주변에 맹탐정 같은 친구가 있다면 “오지랖 부리지 말고 네 앞가림이나 잘해.”라고 말할 테지만, 의뢰할 일이 없을 거라고는 못하겠네요. 인생이란 예측할 수 없잖아요.
십 대 시절 내내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궁금했는데, 되돌아보니 십 대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걸 문득 깨닫습니다. 그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요? 지금의 내가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면 그저 안쓰럽고 때론 서글프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안아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괜찮다고도 말해 주고 싶어요.
자신을 아끼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삶이 버거우면 자신부터 방치하고 싶어지니까. 어쩌면 자신을 방치하고, 방치한 자신을 다시 끌어안는 과정까지도 삶인지도 모르겠다.
그럼 이렇게 말해 줘야겠다.
승지야, 자신을 방치하더라도, 그래서 자신을 방치한 스스로가 싫어지더라도, 다시 자신을 안아 줘, 라고.
어쩌면 나에게도, 나의 아이에게도,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도 감히 하고 싶은 말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안아 주세요, 부디. - [작가의 말에서]
이 책엔 심판자를 자청하는 아이들, 그들에게 심판을 보라고 오히려 자리를 내주는 아이들, 심판자들에게 휘둘렸지만 더는 당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아이들이 나온다. 옳고 그름, 선과 악을 나누려는 게 아니라 내가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 생각해 보자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이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다. 필요한 곳에 이야기가 가닿을 거라 믿는다. 그런 믿음이 없다면 오랜 시간 문장을 쓰고 지우는 과정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믿음이 현실을 재구성, 재인식하게 함으로써 일상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런 글을 통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다시 들여다보자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뛰어난 글을 읽으면 정말 잘 썼다고, 부럽다고 말해 줄 수는 있지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말해 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르니까. 내 재능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데, 다른 사람의 재능을 어떻게 알까.
내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말은 끝까지 써 봐야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끝까지 써 내는 게 작가에게 가장 필요한 재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형편없는 글인 줄 알면서도 끝내 써 내고야 마는 충동, 아집, 결심들. 그런 마음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재능이란 벽을 뚫어 버리는 게 아닐까.
첫사랑은 대개 오해(분명 내 인생의 사랑이야!)와 착각(설마 나를?)으로 시작해 과대망상(이건 로미오와 줄리엣에 버금가는 사랑이야)과 자기혐오(내가 미쳤지, 저런 애를)로 끝이 난다. 사랑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첫사랑이 지나가면 두 번째 사랑이 찾아온다는 것은 안다. 그러니 그저 마음을 다해 사랑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