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성의 함양과 도덕성의 회복
“인생은 끊임없이 현실에 도전하고 저항하면서 살지만 끝내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두고 가는 것”이라는 어느 철인哲人의 말을 나는 나이 80을 넘기고서야 그 진의眞意를 깨달은 지각생이다. 젊은 시절, 늙어서도 절대로 과거의 증인이 되지 않고 항상 창조의 주역으로 발돋움하리라고 다짐했건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과거의 증인으로 물러앉게 된 열등생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와 8·15 광복 6·25 동란, 그리고 숨 가쁘게 달려온 산업화시대를 살아온 나에게는 추억을 더듬고 남들 앞에 내놓을 만한 사진 앨범도 별로 없는 처지라 지난 날의 내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시절에 썼던 글들이 있을 뿐이다. 여기 수록된 글들은 대개 지난 1980년대와 ’90년대, 그리고 극히 일부가 2000년대 초에 쓴 글들이다. 다만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경기대회 때 온 국민이 함께 끓어올랐던 ‘붉은 악마’의 열기에 감동되어 하룻밤을 꼬박 지새우면서 썼던 ‘치우천왕蚩尤天王’ 한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 때 그 때 청탁에 의해 쓴 글이다.
이제 돌이켜 보니 그 때 그 시절이야 말로 우리 현대사, 아니 당대사에서 가장 격동의 시대였고, 21세기로 진입하는 진통의 시대였음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정치·경제·사회·교육·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 오랜 군부 통치에서 벗어나려는 민주화의 힘찬 몸부림 속에서 나 또한 글로, 담론으로, 그리고 강연으로 새 역사 창조에 적극 참여하였다.
일찍이 지도자들이 정신적으로 쇠퇴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민족과 국가가 융성한 예는 없었다. 역대 대통령들이 부끄럽게도 줄줄이 법의 단죄를 받아 온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대통령 자리를 도둑질하는 자리로 생각지 않았다면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고위직 후보자를 검증하는 국회청문회 자리에는 어째서 모두가 범법자들 뿐이란 말인가?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 온 나는 국민소득 3만 불에 가까운 소위 문명국가 중 우리 말고 이런 나라가 또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고도 시급한 과제는 인성의 함양과 도덕성의 회복이라 믿는다. 나는 일찍부터 이를 위한 첫 단추는 붕괴되고 해체되어가는 가정家庭의 복원이라 진단하고, 주로 우리의 전통문화, 그 중에서도 인간관계에 가장 기본이 되는 효孝 문화, 효 사상의 부활과 재정립이야말로 지금 우리뿐만이 아니라 21세기 전체 인류를 구원하는 원동력이 될 것임을 극구 강조해 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오히려 정반대 방향으로만 달려가고 있다. 이를 막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저항해 왔지만 달라진 것이 없으니 이 또한 인생 지각생의 부질없는 푸념이었던가 싶어 자괴감마저 든다. 하지만 거듭 생각해보면 내 어찌 감히 옛 성인聖人께서도 못 다한 세상 바꾸기를 바라겠는가? 다만 바꿔보려고 노력한 흔적이나 남기고 가는 것이 내 분수일 것 같으니 결국 영락없는 나 또한 ‘과거의 증인’이 되고만 셈이다.
당초에 이처럼 한 권의 책으로 엮을 생각이 없이 여기저기에 발표했던 글들을 비슷한 주제별로 묶다보니 특히 예화例話나 개념槪念 서술에 중복이 더러 있게 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읽는 이의 양해를 구한다. 그리고 글들 말미에 출처·발표지·발표 일시를 명기한 것은 모두 지난 날의 글이라 지금 읽는 이의 오해가 있을까 배려한 것이니 그 당시의 상황을 참고해 주기 바란다.
끝으로 유례없는 불황 속에, 특히 출판계의 어려움이 극심한데도 흔쾌히 출판을 맡아주신 범우사 윤형두尹炯斗 회장님과 임직원 여러분, 그리고 오랜 동안 주위에서 나를 도와주고 있는 장희일張熙一 학형과 한국인문사회연구원 홍기철洪起哲 실장께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2017년 3월 서울 성북동 태화정사太華精舍에서
글쓴이 홍 일 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