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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번역

이름:이경준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최근작
2024년 10월 <킹 크림슨>

칠흑 같은 아침

여기 아름다운 실패담이 있다 놀랍게도 이 책의 서문은 ‘실패의 기록’이라는 문구로 열린다. 실패. 반짝거리는 커리어를 보유한 뮤지션의 표현은 당혹스럽다. 자신의 업적이나 성취를 부각하려는 회고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절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곧 그렇게 적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댄다. 성공 스토리로 귀결된 책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고. 이제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받아들일 수 있는 지점에 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순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오며, 어떤 궤적을 그려 왔는지 본인 자신보다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섣부르게 한 사람의 일생을 ‘신화’로 규정하거나 ‘승리자’로 남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건 우리의 오만이자 선입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지. 페이지를 넘기면서 우리는 조금씩 브렛 앤더슨이라는 인물의 진실에 가까워지게 된다. 작가는 차분한 어조로 자신이 그 누구보다 ‘미숙하고 위태로운 영혼’이었음을, 정념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청년이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10대와 20대의 격한 파고를 넘어 본 모든 이들에게, 그의 고백은 상당한 설득력을 발휘한다. 책 속엔 수많은 캐릭터가 등장한다. 가정 내 권력행사를 통해 존재감을 표출하고자 했던 아버지, 묵묵히 응원군을 자임했던 어머니, 일탈을 통해 유대감을 형성한 친구들, 인력과 척력의 법칙에 의해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고 또 멀어져갔던 음악계 동료들. 브렛 앤더슨은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 숨결을 불어넣었고 두루 조명이 돌아가게 함으로써 균형감을 살려냈다. 이러한 서술은 글의 몰입감을 높여주는 효과적 장치로 기능한다.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것. 뜨거운 연애가 있다. 브릿팝에 정통한 사람들이라면 친숙할 한 여인과 두 남자의 이야기.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되뇌곤 한다. 내가 하는 사랑은 불멸하며 퇴색되지 않으리라고. 하지만 그 시절의 우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브렛 앤더슨의 사랑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임스 설터의 말대로 “빛이 넘치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나날”은 언젠가 종말을 고하게 되는 법이니. 뜨거웠던 에너지가 고갈되면, 애정은 종종 자기비하나 상대에 대한 증오로 뒤바뀐다. 모두가 안다. 그런 감정 통제에 능숙했던 자 과연 누구였을까? 작가 브렛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흉물스러운 낙엽더미에서 끄집어낸 가십 대하듯 저 악명 높은 일화를 다루지는 않는다. 그랬다면 이 책은 삼류 일기로 전락하고 말았으리라. ‘마법과 스릴’이 퇴색한 막다른 골목에서, 브렛이 ‘연애의 추락’으로부터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는 직접 본문을 통해 확인해보면 된다. 이런저런 에피소드들로 물결을 일으키던『칠흑 같은 아침』은 스웨이드가 막 주목받기 시작한 시점에 페이드아웃된다. 이후 신 내부에서 펼쳐지게 될 더 길고 긴 궁금하게 만들어 놓은 채로. 예고했던 바대로 이것은 ‘전사’이기 때문이다. 얼마 후 더 풍성한 볼륨을 가진 2부 『블라인드 쳐진 오후』(2019)가 공개되었는데, 후일담을 기다릴 수 없는 분이라면 이 책을 구해 읽으셔도 좋겠다. 아쉽게도 국내 발간은 장담할 수 없지만 말이다. 번역을 하며 스웨이드의 곡을 반복해서 들었다. 〈Animal Nitrate〉, 〈Metal Mickey〉, 〈The Wild Ones〉, 〈New Generation〉 …. 그들의 음악이 울려 퍼지던 1990년대 중후반을 분명히 기억한다. 정말이지 두려운 게 없었고 온종일 노래만 듣고 있어도 행복해지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흘렀다. 솔직히 원서를 처음 받았을 때 나는 브렛 앤더슨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국내 독자들에게 영향력이 있을지 의심했다. 하지만 적어도 번역을 마친 지금, 이 글이 가진 밀도와 흡입력에 대해서는 살짝 알겠다. 브렛은 자신이 상정한 유일한 독자인 아들 루시안에게 언젠가 ‘유의미’할 수 있다면 족하다며, 소박하고 겸손한 소회를 밝힌 바 있는데, 그보다는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부디 저 아름다운 실패담이 그의 음악을 가슴 속에 간직한 사람들에게 진정성 있게 다가갈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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