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경인년은 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이면서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100년 전에 나라를 빼앗겼던 경술국치의 백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지금 아직까지도 일제 강점기의 문화를 청산하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의 정책은 효율적인 식민 지배를 위한 탄압이었고, 고유성 말살 및 우민화, 철저한 경제적 수탈 등으로 영구 예속화를 의도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조선 사회는 식민지 공업화 정책에 의해 강제된 ‘근대’를 체험하게 된다. 식민지 치하의 조선인에게 다가온 ‘근대’의 모습은 라디오, 축음기, 영사기와 같은 발명품, 혹은 미술 전람회, 물산 박람회, 운동회, 영화관, 유람단, 광고 모델 등이었다. 여기에서 권번 기생의 화려한 등장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고관대작들이나 학자들의 회합에서만 하더라도 기생이 나오지 않는 장면은 상상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연예인의 효시가 되는 기생들은 전통 예악문화의 계승자이면서 근대적 연예인이었다. 라디오 방송에 권번 기생을 빼놓고는 방송 편성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축음기의 SP레코드는 권번 기생 출신 대중가수들, 왕수복, 선우일선, 김복희 등에 의해 폭발적인 판매를 이룬다. 영화의 여배우로 당시 트로이카를 이루었던 기생은 이월화, 석금성, 복혜숙 등이었다. 그리고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에 출연한 기생 신일선도 빼놓을 수 없다.
초창기 미술 전람회의 모델도 권번 기생이 거의 장악할 정도로 중요했다. 조선 물산 박람회에서는 공연과 여흥의 중심을 차지했다. 신문 및 잡지의 광고 모델로서는 장연홍, 노은홍, 김영월, 김옥란 같은 기생들이 매력적인 존재였다. 요즈음 행사 도우미처럼 각종 행사에는 기생의 공연이 늘 한결같이 따라다녔다. 더구나 레뷰댄스의 대중화에 기여한 인물도 바로 기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