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신약학에서 나의 블루오션은 신약신학을 교회 친화적으로, 주로 체험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렇게 신약학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완전한 블루오션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내가 스스로를 교회 친화적 성서학자라고 여긴다고 해서, 교회가 믿고 행하는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본서에서 나는 끊임없이 교회가 믿고 행하는 일들이 성서적 근거가 있는지를 물었다. 교회가 믿고 행하는 바를 성서의 진리에 따라 교정해야 함을 역설했다. 전통과 문화라는 두 돌덩어리가 성서의 샘에서 진리를 캐내는 데 많은 방해가 되었음을 보았다. 효, 교회, 기도, 교직 제도, 성령 충만 등의 주제에 있어서 한국 교회가 오해하고 곡해했던 것들이 본서를 통해서 교정되기를 희망한다.
<저자 서문>
한 사람과 두 번 결혼하는 것이 드문 일이듯이, 한 교회에 두 번이나 담임 목사로 청빙 받는 일도 흔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대학 교회라는 특수성과 우리 교회가 처했던 어려운 일로 인해 나는 평택대학 교회에 초대 담임 목사로(2004-2009) 청빙되었다가, 6대 담임 목사로 재청빙되어 사역하고 있다(2018-).
첫 번째 목회에서 이미 사도행전 본문으로 1년 정도 설교한 적이 있었기에(『누가신학 렌즈로 본 사도행전』, 프리칭아카데미, 2007로 출간) 같은 본문으로 두 번째 설교하는 것은 설교자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같은 교회에서 두 번 청빙 받아서, 사도행전을 또 다시 설교한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다시 설교하면서 우리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도 찾았고,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게 무슨 말씀을 주시고자 하는 바도 깨달았다. 수요 기도회에서는 주로 이전에 설교했던 본문을 이전에 출판된 자료를 사용하여 설교했고(그 대부분이 본서에 포함되어 있음), 주일 예배에서는 이전에 설교하지 않았던 본문으로 주로 설교했다. 그래서 결국 1년 반 만에 사도행전 설교를 마쳤다.
설교자이기 이전에 신약 학자이기도 한 저자는 평택대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목회학 석사 과정 학생들에게 사도행전 과목을 가르치며 내가 설교한 것을 주석적으로 재점검하는 기회도 가졌다. 또 이 과목 수업을 진행하면서 사도행전이 먼지 구덩이에 쳐 박혀 있을 역사책이 아니라 현대 교회에 있어서도 사역 매뉴얼의 역할을 한다는 확신을 더 확고하게 갖게 되었다.
이제 그 결과물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본서를 내놓는다. 나는 사도행전을 강해 설교하면서 사도행전이 제시하는 신앙의 길이 무엇인지 계속 물었다. 그리고 발견한 것이 ‘코람데오 플러스’라는 것이다. 사도행전이 제시한 신앙의 길은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를 기본으로 하면서, 또 그것을 능가하는 ‘코람데오 플러스’다. 그것은 말씀에 입각하면서, 또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이다.
사도행전이 내게 은혜가 되었고, 사도행전 강해 설교가 우리 성도들에게 울림이 있었다. 본서가 같은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독자들에게도 은혜와 울림이 있기를 소망한다. 또 내가 사랑하는 한국 교회가 세상의 상식을 넘고, 기존의 교회의 상식을 넘어 누가가 제시하는 코람데오 플러스의 신앙을 가진 교회가 되기를 갈망한다.
이미 장성한 자녀들인 김지유(며느리 김희연), 김혜유(딸), 김성유(아들)와 조카들(도현, 대호, 예지, 예준)에게 앞으로 코람데오 플러스의 삶을 살라는 의미로 본서를 준다. 우리 자녀들이 모두 이런 삶의 원칙으로 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원고 교정을 해 준 이인숙 권사님과 한순희 집사님과 이우경 박사님께 감사드린다.
2020년 10월
인천 송도에서
한국 교회에 관해서 쓴 신학 서적과 신학 논문에는 부정적 평가가 압도적으로 많다. 온라인 공간에서의 일반인들의 평가는 더 심하다. 많은 이들에게 한국 교회는 망할 교회이고, 한국 기독교는 ‘개독교’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가 과연 한국 교회에 대한 올바른 진단이고, 편견 없는 판단인가?
나도 한국 교회에 부정적인 요소가 있다는 데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한국 교회 안에 침투한 샤머니즘 사상과 특히 이데올로기적 효로 대변되는 유교의 가부장제 사상에 대해서는 나 자신도 논문과 칼럼 등을 통해서 비판을 했다. 지금까지 식자들은 주로 한국 교회 안에 있는 샤머니즘적 요소를 주로 지적했지만, 나는 가부장제적 요소가 신약 성경을 이해하는데 더 많은 방해가 된다고 본다. 이러한 사상은 신약 성경이 제시하는 평등의 비전을 보지 못하게 한다. 또 직분을 통해서 타인을 쉽게 지배하는 것으로 많이 이용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적인 요소가 있음을 있음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 교회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미국과 영국에서의 5년의 유학 기간 중에 나는 그곳의 크리스천들(주로 신학자들)을 만나 볼 수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서 느낀 것을 지나친 일반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대체로 이런 것이었다. 그들은 평균적으로 우리보다 성숙한 크리스천 인격을 갖고 있었고, 문화적으로도 그들의 문화는 우리보다 더 성서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이 성서에 있는 많은 중요한 진리를 잃어버렸다고 느꼈다. 그들의 고매한 인격에는 첫 크리스천들이 가졌던 뜨거운 기도나 전도 열정이 없었고, 그들의 잘 직조된 사상에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가 들어갈 틈이 없었다. 우리가 문화적으로 유교와 샤머니즘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은 크리스천들이었다.
아마도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공정한 평가일 것이다. 서양 크리스천들이 성서적 진리를 간직한 것도 있고 잃어버린 것이 있듯이, 한국 크리스천들도 성서적 진리에 배치되는 사상도 가지고 있고 동시에 서양 크리스천들이 잃어버린 성경적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요소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나는 신약 학자로서 이런 질문을 가지고 여러 논문을 썼다. 내가 발견할 것들에는 기도, 특히 통성 기도와 방언 기도, 성령 체험과 같은 것들이 있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체험한 사람들의 비율이 서양 기독교인들에 비해서 월등히 높다. 그래서 한국 교회 크리스천들이 서양 크리스천들이 도달해 있는 인격의 성숙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을 경험하고, 회개하고, 전도하는 데는 앞서 있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에서와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야곱과 같은 사람들이다. 에서는 매너 있고 야곱보다 정직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야곱보다 못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한국 교회에 대한 신학자들의 비판은 부정적인 것이 압도적으로 많을까? 아마도 그 이유 중 하나는 각 신학자가 서 있는 신앙적 위치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한국 교회를 과도하게 비판한 사람들의 위치는 주로 인본주의, 일반 상식, 신학적으로 리버럴한 진영이다. 그렇다면 현재 있는 그대로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그 성경에 있는 것을 지금 체험하며, 그 성경에 있는 하나님과 지금 교제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보면 한국 교회의 현재 모습은 앞의 사람들이 본 것과는 다를 수 있다. 흥미롭게도 한국 교회 성도들은 다수가 이런 시각으로 보는데 반해, 이런 시각으로 보는 신학자는 소수다.
나는 본서에서 한국 교회의 좋은 유산을 찾고자 한다. 한국 교회에 전반에 관한 유산들, 예를 들어, 통성 기도, 성경 사랑, 메신저 존중 등에 관해서 연구할 수 있겠으나 본서에서는 지도자적 목회자들의 신학 유산을 살펴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한국 교회에 널리 펴져 있는 신앙이고, 그 유산을 잘 평가하여 좋은 것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도 좋은 유산이 많다. 교회 개혁을 하면서, 이러한 좋은 유산까지 버리면 안 된다. 유홍준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에서 한국 역사에서 좋은 유산을 찾듯이, 나는 앞으로도 계속 한국 교회의 좋은 신앙 유산을 찾을 것이다. 그 첫 번째 결과가 바로 본서다.
특히 한국 교회는 나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다. 나는 어렸을 때 교회 부흥회에 참석해서 이른바 은혜를 체험하고, 또 주일학교에서 배운 성경 지식에 힘입어 크리스천으로 살아왔다. 그때 배웠던 성경과 체험 신앙이 나를 한국 교회를 사랑하는 신앙으로 이끌었다. 비록, 지금은 개독교란 교회 내외적인 비판으로 만신창이가 된 한국 교회지만 여기에도 하나님이 주신 너무나 소중한 유산들이 많이 있다. 본서는 바로 내가 발견한 귀한 유산들이다. 이 유산을 누릴 수 있게 해 준 한국 교회 믿음의 선배들께 감사드린다. 우리의 후손들도 이 귀한 유산을 잘 간직하고 누리기를 소망한다.
2020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