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파치노는 1940년 4월 25일 미국 뉴욕의 이스트 할렘에서 이태리 시실리섬 이주민 출신 보험외판원 아버지 살바토레와 어머니 로즈 사이에서 태어났다. 2세 때 양친이 이혼하고 알 파치노는 어머니와 함께 빈민가에 있던 외할아버지 댁으로 가게 된다. 감수성이 풍부한 어린 시절의 알 파치노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과잉보호로 7살이 될 때까지 거의 집밖에 나가지도 못했다고 한다.
고독한 소년시절을 보낸 그는 이때의 감상을 9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을 때 브룩크스에 사는 소녀 팬에게 자신도 브롱스의 슬럼가 출신이라며 용기를 가지라고 말하며 밝힌 적이 있다. 브롱스의 고독한 유년시절을 보낼 때 부터 그의 위안은 오로지 영화 뿐이어서 자연스럽게 배우가 될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초등학교때 그의 재능을 알아본 선생님의 배려로 연극에 출연한 것을 빼고는 평범한 시절을 보냈던 그는 후에 연기예술학교로 옮겨간다. 하지만 오로지 영어에만 흥미를 느꼈던 알 파치노는 17살에 학교를 중퇴하고 그후 몇 년간 빌딩 수위나 사무실 우편배달부, 영화관의 안내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한다. 하지만 그는 다시 연기수업을 받기 시작하고 조그만 무대-오프-오프 브로드웨이 작품에서 간간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돈을 모은 알 파치노는 66년에 저명한 연기학교인 액터스 스튜디오에 들어가 본격적인 연기수업을 받게 된다.
그는 연극 <평화 위원회 The Peace Creeps>에서 제임스 얼 존스와 공연한 후 오프 브로드웨이의 사회 드라마 <인디안은 브롱크스를 원한다 The Indian Wants the Bronx>에서 포악한 거리의 젊은이로 분해 '오비 상'과 1967-68년 연극 시즌 '최고 배우상'을 수상한다. 일년 후 그는 <호랑이는 넥타이를 찾는가? Does the Tiger Wear a Necktie?>로 브로드웨이 데뷔를 했다. 비록 그 연극은 40일도 못돼 간판을 내렸지만, 파치노는 반사회적인 약물 중독자 역할로 극찬을 받고 토니상을 수상했다.
연극무대에서 연기경험을 쌓은 그는 대부분의 연극배우들처럼 영화에 출현하게 된다. 1969년 영화 <나, 나탈리 Me, Natalie>의 조그만 역으로 출발한다. 알 파치노는 70년 <쥐새끼들 Rats>로 연극 연출 데뷔를 한 후, 1971년 두번째 영화 <백색공포>에서 일약 주인공을 맡게된다. 그는 이 영화에서 마약중독에 빠지는 뉴욕의 풋내기 예술가 역을 잘 소화해 낸다. 영화는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파치노는 다시 비평의 격찬을 받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영화에서의 연기를 보고 파라마운트는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72년 마피아 서사시 <대부 The Godfather>에 그를 캐스팅하기로 확정했다는 것이다. 마이클 콜레오네 역으로 파치노는 아카데미 남우 조연상에 노미네이트 되면서 스타덤에 오른다. <대부>는 최우수 작품상, 각색상을 수상하였고 이 영화에서 알 파치노는 돈 꼴레오네(말론 브란도)의 막내 아들 마이클 꼴레오네 역을 맡아 대선배 배우 말론 브란도 못지 않은 연기를 보여주어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다. 알 파치노는 이후 <대부> 2편과 3편에서 모두 주연을 맡아 <대부 2>의 연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다
75년 실화에 근거한 <개 같은 날의 오후 Dog Day afternoon>에서 그는 게이 연인의 성전환 수술비용을 위해 은행을 터는 강도로 출현해 성공을 거뒀지만, 77년 자동차 경주 드라마 <바비 디어필드 Bobby Deerfield>는 재앙이었다.
다시 브로드웨이로 돌아와 <파블로 험멜의 기초 훈련 The Basic Tranning of Pavlo Hummel>의 주인공으로 두 번째 토니 상을 수상한다. 할리우드로 돌아와 출연한 <... 그리고 모두를 위한 정의 ...And Justice for All>는 비평적 주목을 끌지는 못했지만 관객들이 좋아했다.
파치노의 다음 영화는 동성애자를 표적으로 삼은 연쇄 살인자를 추적하는 뉴욕의 경찰로 출연한 윌리엄 프리드킨의 <크루징 The Crusing> 이었다.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고 이어지는 82년작 코미디 <신, 신 Author, Author>도 마찬가지였다.
<대부>의 성공 이후 그는 <뜨거운 오후>, <스카 페이스>, <광란자> 등에 출연하며 시드니 루멧, 윌리엄 프레드킨, 브라이언 드 팔머와 같은 쟁쟁한 감독들과 일을 했지만 흥행적으로는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대신 비평가들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나 나중에는 명작으로 인정받았지만 <스카 페이스>와 <혁명> 두 편이 잇달아 흥행에 참패하여 89년까지 그는 영화계를 한동안 떠날 수밖에 없었다. 브라이언 드 팔머의 83년판 리메이크 영화 <스카페이스 Scarface>는 처음 개봉때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그 후 결국 컬트영화가 되었다. 85년작 역사 서사시 <혁명 Revolution>은 2800만불 이상을 들여 제작됐으나 박스 오피스에서 백만불도 벌어들이지 못했다.
대중들의 눈으로부터 사라진 파치노는 자신의 영화인 <오욕의 지방 The Local Stigmatic>을 연출했다. 이 시기 동안 많은 영화들이 그를 원했지만 그는 4년 이상 스크린으로부터 사라졌다.
그러나 89년 스릴러물 <사랑의 바다 Sea of Love>로 재기에 성공한 그는 그 다음 영화 <딕 트레이시>로 다시금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 된다. <대부 3>은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91년 로맨틴 코미디 <프랭키와 쟈니>는 성공했다. 그리고 1992년은 알 파치노에게 최고의 해가 된다. 그는 <글렌게리 글렌 로스>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에, <여인의 향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동시 노미네이트되고 드디어 남우주연상을 거머쥔다. 그에게 이것은 유난히 상복이 없던 그에게 8번의 노미네이트만에 수상한 오스카가 되었다.
1993년에는 <스카 페이스>로 인연을 맺은 브라이언 드 팔머 감독의 영화 [칼리토]에 전직 마약상으로 출연하는 하고 1995년, <히트>에서는 또 한명의 거물급 연기파 배우 로버트 드 니로와 뜨거운 연기대결을 펼치며 호연을 보여준다. <씨티 홀>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알 파치노는 세익스피어의 '리차드 3세'를 영화화한 <뉴욕광시곡>을 직접 감독, 연출, 연기하고 이 영화는 미국감독협회상을 수상한다.
99년 올리버 스톤 감독의 <애니 기븐 선데이>와 비록 한 부문도 수상하지 못했지만 아카데미 7개 부문 후보에 오른 영화 <인사이더>까지 60세의 나이가 무색할만큼 정력적인 배우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