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로서의 인물에 대한 미술사학적 연구는 전기傳記와 역사서歷史書를 직조織造하는 행위여야 한다는 믿음이 내게는 있다. 대상 인물의 입장만을 옹호하거나 널리 드러난 사실만을 사료로 채택했을 때, 자칫 진실과는 교착 상태에 빠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엄정하게 균형 잡힌 시각으로 한 인물의 삶을 포용하되 그가 헤쳐나간 역사의 소용돌이마저 의미 있게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번 고희동 연구에서도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개인사를 사회적인 활동과 교유라는 보다 큰 틀 안에서 직조하고자 하였다.
춘곡 고희동 연구를 진행하면서 일찍 깨닫게 된 사실이 있다. 그의 이름 앞에 늘 따라 붙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말 이외에 그를 수식하는 표현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일생 동안 벌여 온 미술계에서의 복잡다단한 활동에 대해 적지 않은 양의 기록이 남아 있는 것과 비교할 때, 그 자신의 신상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도 극히 제한적이다. 이번 연구가 그의 행적에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최초’, ‘서양화가’라는 수식어와 그의 신상에 대한 무지 사이를 오가며 진행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서두에 그의 가계를 중요하게 다룬 것이며, 부친 고영철과 그 형제들, 나아가 고희동과 그 형제들을 폭넓게 다룬 것도 그 때문이다.
이번 연구에서 필자는 고희동이란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근대 속으로 여행을 떠났다. 개화기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여행에서부터 고희동의 부친 고영철의 영선사와 보빙사의 일정을 따라나섰고, 고희동과 함께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 서 있는 듯한 환영까지 떠올랐다. 고희동의 살림살이는 넉넉하지 않았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그는 좋은 친구 이도영, 자애로운 스승 조석진과 안중식, 아버지 친구이자 동지였던 오세창, 시대의 기인인 최남선 등과 함께 어울리는 행운도 누렸다. 이들과의 만남으로 근대기 화가로 성장한 그는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현대 미술의 장을 열어젖혀야 했다. 모든 일에 공과가 있듯, 현대 미술의 장에서 그가 벌인 활동에도 분명 공과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