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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김익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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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성령을 받으라>

김익두

한국교회의 무디(D. L. Moody)로 일컬어지며 한국기독교 초기의 대부흥을 이끌었던 김익두 목사는 1874년 황해도 안악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원래 유서 및 선법을 즐겼으나 과거시험과 사업에 실패한 후 술과 완력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00년 소안련(W. Swallen)이 인도하는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 후 1901년 무렵부터 재령, 신천 등지에서 전도사로 사역하였으며, 1910년에 평양신학교를 제3회로 졸업하면서 본격적인 목회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김익두 목사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11년부터 부흥회를 인도하기 시작했고, 그의 사역의 대명사가 된 ‘이적’(異鎮)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특히 1919년 경북 달성의 현풍교회 사경회를 기점으로 수많은 이적들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이 같은 기적은 일제 치하라는 민족적 고난과 좌절에 빠져 있던 백성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성령을 강조하고 내세지향적인 설교를 좋아했던 김익두 목사의 성향이 신앙을 통해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하던 당시 사람들의 기대와 들어 맞았던 것이다. 중국, 시베리아, 일본 등지에서 인도했던 700회가 넘는 부흥회와 그로 인해 설립된 150개 이상의 교회는 그의 사역의 파워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뿐만 아니라 주기철, 이성봉 목사 같은 한국기독교의 지도자들 역시 그의 열정적인 부흥회를 통해 배출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김익두 목사의 이적 행진은 교회 안팎의 수많은 비난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해노회는 임택권 목사를 필두로 ‘이적명증회’ 가 조직되어 김익두 목사의 이적을 면밀하게 조사하는 한편 그 결과로 1921년 《조선예수교회 이 적명증》이란 책을 발간하기에 이른다.
이후 김익두 목사는 서울 남대문교회(1926-27)와 승동교회(1935-38)를 담임했고, 태평양전쟁 기간 중에 잠시 활동을 중지하기도 했지만, 해방과 함께 1946년에 북한기독교연맹에 가입하는 등 이북의 여러 지역을 돌면서 적극적으로 부흥회를 인도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50년 10월 14일 새벽예배를 마치고 나오다가 후퇴하는 북한의 인민군에게 총살되어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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