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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Frank William Schofield)

성별:남성

사망:1970년

최근작
2014년 12월 <프랭크 스코필드 (한영합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3·1 독립운동의 민족대표 34인으로 우리나라에 알려진 캐나다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한국 이름 석호필石虎弼)는 세계적 수의학자로 1916년 자원하여 한국에 선교사로 왔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세균학 교수로 일하였는데, 3·1 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이갑성으로부터 독립만세 현장의 사진을 찍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를 사진 기록으로 남겼으며, 독립운동을 측면에서 적극 지원하였다.

1919년 4월 15일 제암리 사건이 일어나자, 감시의 눈을 피해 제암리 일대의 현장을 사진에 담아 전 세계에 알렸다. 만세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과 어윤희,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잡힌 사람들을 옥중 방문하였고, 감옥에 갇힌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였다. 그러나 고등계 형사의 밀착감시, 암살 미수 등 일본의 전방위 견제와 캐나다 선교회와의 갈등으로 반강제로 캐나다로 귀국하게 되었다. 캐나다에 돌아간 후에도 국제 언론에 한국에서의 일본의 만행에 대한 기고를 계속하였고, 이에 일본은 한국에서의 무단통치와 문화 말살 정책을 다소 완화하게 된다.

토론토 수의과 대학에서 그는 가축에서의 출혈 원인을 규명하여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이 연구는 오늘날 사용되는 혈액응고 방지제 디큐모랄과 비타민 K 발견으로 이어졌다. 캐나다에서 은퇴한 후 1958년부터 한국에 영구 정착하여 서울대 수의과대학, 연세대 의과대학, 중앙대 약학대학에서 세균학 등을 강의하였다. 보육원 후원, 학생을 대상으로 한 신약성경반 주관 등으로 바쁜 날을 보냈으며, 이승만 정권을 비롯한 역대 정권에서 한국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비판하고, 정의사회 수립과 고아, 과부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주장하여 정부와 불편한 관계에 놓인 적도 있었으나 당시 지식인들에게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1970년 4월 12일에 별세하여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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