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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유장경 (劉長卿)

국적:아시아 > 중국

사망:7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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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큰글자책] 유장경 시선>

유장경(劉長卿)

자(字)는 문방(文房)이며 조적(祖籍)은 선성(宣城)으로 당(唐) 현종(玄宗) 개원(開元) 초기에 낙양(洛陽)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말년의 관직이 수주자사(隨州刺史)라서 그를 유 수주(劉隨州)라고도 부른다. 그의 선조에 대해선 단지 그 조부 유경약(劉慶約)이 고공랑중(考功郞中)을 지냈다는 기록이 있을 뿐 부친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데 이는 아마도 그 관직이 낮거나 출사하지 않은 때문인 듯하다.

유장경은 청장년 시기를 개원(開元)·천보(天寶) 성세에 보냈으나 생활은 빈곤했다. 천보 연간에 세 번이나 과거에 실패했다가 천보 말년에 과거에 합격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 정식으로 벼슬에 나서지 않은 상태에서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난을 피해 남쪽으로 갔으며 양주(揚州)·소주(蘇州) 일대에서 유랑하면서 관직을 구했다. 그러다가 강동채방사(江東採訪使) 이희언(李希言)의 도움을 받아 지덕(至德) 2년(757)에 장주위[長洲尉, 장주는 현재 저장성(浙江省) 쑤저우(蘇州) 부근]가 되었다. 건원(乾元) 원년(758)에 해음령[海鹽令, 해음은 현 저장성 하이옌현(海鹽縣)]이 되었다. 그러나 곧 무고를 당해 그해 봄에 파직되었고 장주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듬해인 건원 2년 봄에 유장경은 반주(潘州) 남파위[南巴尉, 남파는 현 광둥성(廣東省) 뎬바이(電白) 부근]로 폄적되었다. 상원(上元) 2년(761) 봄에 대사면을 받아 행장을 꾸려 북으로 돌아가다가 여간[餘干, 현 장시성(江西省) 포양현 남쪽]에 이르렀고 그 부근에서 가족과 잠시 상봉했다. 보응(寶應) 원년(762) 봄에 폄적에서 풀려나 다시 강남으로 돌아와서는 잠시 소일했다. 얼마 뒤에 회남(淮南) 막부로 들어갔다. 회남의 막부에 5년 정도 있다가 경사로 불려 갔다. 전기(錢起), 원재(元載) 등과 즐겨 창화를 하며 시명을 날렸지만 그 생활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대력(大曆) 4년에 다시 조정을 떠나 남하해 소상(湖湘) 일대를 유랑하다가 다시 회남 막부 생활을 했다. 대력 6년에 전운사판관(轉運使判官)으로 장사(長沙)에 와서 양식을 모으는 일을 맡았다가 탐관오리인 오중유(吳仲孺)의 모함을 받았으며, 그 일로 결국 목주사마(睦州司馬)로 다시 폄적을 당했다. 그때 별장을 짓고 비교적 한가한 생활을 했다. 두 딸이 이목(李穆)과 최진보(崔眞父)에게 시집갔으며 또 두 아들도 낳았다. 이 목주사마 시기에 여러 문인들과 즐겨 시를 지으며 창화했다. 목주에 6년 정도 거한 후, 건중(建中) 원년에 수주자사(隨州刺史)를 제수받았다. 그 뒤에 회령군절도사(淮寧軍節度使) 이희열(李希烈)이 반란을 일으키자 관직을 잃고 양주(揚州) 사위 이목의 집에서 난을 피했다. 유장경은 그 뒤 복직되지 못하고 강남에서 한거하다가 정원(貞元) 6년(790)경에 생을 마쳤다. ≪유수주 시집(劉隨州詩集)≫ 10권과 ≪외집(外集)≫ 1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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