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呂運亨, 1886~1947)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정치가. 경기도 양평 출생. 조선시대 양반사회와 계급주의를 신봉하는 부친과 달리 동학에 가담한 조부와 증조부에게 큰 영향을 받음. 1900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기독교를 접하고, 홍화학교와 우무학당에서 수학. 1906년 부친이 사망하자 집안 노비문서를 모두 불태워 그들을 해방시킴. 1907년부터 선교사 보조원 생활을 했으며 고향집에 광동학교를 세워 청년들을 계몽하는 데 앞장섬. 이후 강릉 초당의숙에서 평등사상과 신학문을 가르쳤으나 총독부에 의해 1년 만에 폐쇄.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가 신학문 공부, 1918년 상하이에서 장덕수를 만나 정치와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어 일대 전환기를 맞음. 1920년 조선 독립을 지원받을 수 있다는 제안에 공산당에 참여했으나 와해됨. 1922년 모스크바에서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 조선의 사정을 논의, 중국 상하이로 돌아와 쑨원과 중국 공산당 인사들과 교류, 1925년부터 중국혁명운동에 적극 참여. 1929년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혐의로 상해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됨. 이후 중국에서 실패한 공산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 허망한 날을 보냈으나 국내에 서 일약 유명인이 됨. 1933년 민족의 영웅으로 추대되며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으로 취임, 그의 명성에 힘입어 번창했으나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1936년 폐간됨. 1944년 조선건국동맹 조직. 1945년 광복을 맞아 건국 준비위원회 조직, 임시정부 지사들과 대립. 1946년 민주 주의민족전선을 결성, 반대파에 밀려 탈퇴. 1947년 근로인민당을 조직했으나 극좌, 극우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 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극우파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조선건국동맹 위원장,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조선인민당 당수, 조선체육회 (대한체육회 전신) 제11대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대통령장(2005), 대한민국장(2008)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