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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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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이계성

번역과 저술을 통해 대규모 언어 모델과 컴퓨터 생성 텍스트의 능률적이기보다는 시적인 측면들을 고찰하고자 한다. 『파르마코-AI』(작업실유령, 2022), 『태양과의 대화』(미디어버스, 2023) 등의 책을 옮겼고 『맥락과 우연?GPT와 추출적 언어학』(미디어버스, 2023)의 저술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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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태양과의 대화> - 2023년 9월  더보기

AI와 함께 글을 쓰는 과정은 생각의 흐름, 즉 우리가 쉽게 간과하고는 하는 서브텍스트를 탐구해 보는 과정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의도, 편견, 신념이 증폭되어 도로 우리에게 비춰지는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마치 겉모습을 비춰 줄 뿐만 아니라, 정체성 또한 굴절시킴으로써 자아의 다양한 잠재적 모형들을 내비치는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태양과의 대화』의 독자는 변화무쌍한 자아의 만화경과도 같은 혼성적 정체성의 공간으로 발을 내딛는다. 아핏차퐁과 태양이 서로 뒤바뀌고, 크리슈나무르티, 달리, 아서 C. 클라크의 환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며, 손더스 부인이라는 인물은 퇴치사가 언급되자 갑자기 캐스퍼스 부인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마치 만화경을 돌릴 때마다 변모하는 환상처럼 정체성이 바뀌고, 합쳐지고, 사라지기도 하는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바로 이와 같은 자아의 변동성이다. 만화경을 돌릴 때마다, 또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하나의 태양이 아닌 무수히 많은 각양각색의 태양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GPT-3는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이 재창조되고 증식한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태양은, 대화의 모든 등장인물과 마찬가지로, 단일한 개체가 아니라 끝없이 배열된 다중의 집합이기도 하다. 각각의 발화, 각각의 입출력은 자아의 자기유사적, 프랙털적 증식 과정의 찰나가 된다. 태양은 행성계의 중심이라는 상식과는 다르게, 작품 속에서 달리는 태양에게 “각각의 별은 너와 같은 태양“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태양과의 대화』에서는 자연 신경망(아핏차퐁), 인공 신경망(GPT-3), 그리고 모든 허구적 등장인물이 각자 나름대로 지식의 중심, 즉 태양으로 기능한다. 놀랍게도, 작품의 제목과는 달리, 태양은 서사를 지배하지 않는다. 또한 다른 등장인물이나 작가를 압도하지도 않는다. 태양의 존재는 다채롭고, 그 정체성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인공지능이 서사 구성의 영역에서 인간 중심적 창의성에 의문을 제기하듯이, 이러한 중심성의 결여는 태양의 위계적 우월성에 대한 통념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태양을 권위와 진리의 유일한 원천으로 여기는 데에 익숙하다. 플라톤의 동굴에 내리쬐며, 형상의 세계를 비추고, 해석할 그림자를 드리우는 그 태양을 생각해보라. 하지만 관점을 바꿔서 태양을 단일한 근본적 개체가 아닌, 세상을 비추는 뭇별로 바라보면 어떨까? 그러면 지식이나 정체성은 단일한 인식 체계에 따른 수직적 정렬이 아니라, 어떠한 이해의 모형에서 또 다른 이해의 모형으로 옮겨가는 수평적인 변환성이 될 테다.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프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이와 같은 역학 관계에서는 서로 주고받는 아이디어 하나하나가 서사를 진척시켜 나간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이 AI의 한계에 대한 통찰 또한 제공한다는 점이다. GPT-3는 종종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GPT-3가 인간적 경험의 미묘한 측면들을 파악하는 데에 겪는 어려움을 암시한다. 하지만 이러한 미흡함은 서사를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추가적인 탐구의 장이 되어, 우리가 당연시하고는 하는 생각과 감정의 복잡성에 의문을 제기하게끔 한다.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이러한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기계 환각”으로 간주한다면 논리적으로는 타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만화경을 조금만 더 돌려 보면, 이러한 가변성과 비일관성은 이 대화적 실험의 의도적인 일부분임이 보일 테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태양과의 대화』는 파편적인 대화들로 짜 이루어진 배열이기도 하다. 아핏차퐁이 제공하는 프롬프트 하나하나는 대화를 재시작할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을 새롭게 재창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GPT-3는 우리의 가상의 만화경과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혼성성은 대규모 언어 모델의 근본적인 측면이다. 대규모 언어 모델은 입력값으로 주어지는 문맥과 의도에 따라 다양한 정체성을 취한다. 다시 말해, GPT-3는 본질적으로 다양한 관점의 복합체이자 여러 지식의 모형의 집합체이기도 하다. 『태양과의 대화』에서는 바로 이러한 측면이 증폭되어 나타난다. 어쩌면 『태양과의 대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측면은 모호함 속에 머무르기를 고집한다는 점이다. 이 텍스트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 조화시키려 하지 않으며, 대화가 전개되면서 드러나는 모순을 해결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이러한 모호성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서사의 본질적인 측면으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듯하다. 이는 서사에서 확실성과 일관성을 추구하는 습관을 재고하고, 서사란 반드시 결말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우리를 부추길 수도 있다. 이처럼 모호함 속에 머무르는 행위의 또 다른 층위는 서사에 담긴 의미를 두고 벌이는 지속적인 재협상이다. GPT-3의 대답 하나하나는 앞선 담론을 재맥락화해서 재해석을 부추기며, 가변적인 역학 관계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부추긴다. 독자로서 우리는 줄거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의미의 실타래를 풀고 또 엮어 나감으로써, 독서 행위를 상호적이고 진화해 나가는 대화로 전환시킨다. 『태양과의 대화』에서 펼쳐지는 서사는 심오한 불확정성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더 깊숙한 자기 성찰을 유발하는 불확실성 말이다. 이 공유적 대화의 공간에 목적성이란 없다. 모든 주장은 잠정적일 뿐이며, 언제든지 재해석 가능하다. 이는 회의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무엇이든 가능하고, 심지어 “나”도 만들어진 허상이고, 의심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 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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