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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의 기미는 아주 작은 곳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취업 전선에서 낙오한 후 겨우 진입한 대기업 고객센터에서 개인정보 유출 후 성이 난 고객들의 감정 앞에 무방비로 놓이기까지. (어디까지를 묻다 中), 우아한 중산층의 세계에 사는 '깨어 있는' 주부가 맞은 편 아파트에서 아동 학대가 분명한 풍경을 목격하기까지 (이창 中), 마침내 감정을 착취당하던 '을'들이 덩굴식물로 변해버리는 전염병이 창궐하기까지. (덩굴손증후군의 내력 中) 삶은 재난처럼 급작스럽게 휘몰아치고, 대체로 사람들은 '그것은 나만은 아니기를' 소망하며 타인의 재난을 방임하고 지나쳐 간다. 그 배에 탄 사람이 내가 아니기를, 그 빌딩에 있던 사람이 내가 아니기를, 그 공장에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기를.
<위저드 베이커리>, <아가미>, <파과>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청소년문학, 순수문학, 장르문학을 자유롭게 유영해 온 구병모의 두번째 소설집. 집요한 관찰자의 눈으로 구병모는 재난 같은 삶의 순간들을 날카롭게 베어 소설로 내놓는다. 극히 현실적이라 오히려 초현실적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길고 정확한, 구병모만의 독특한 문장과 함께 선명한 미감을 만들어 낸다. 덩굴이 되어버린 사람을 다른 사람이 베어버리는 풍경은 초현실적이지만, "보기에 좀 불편해 그렇지, 못 본 척하고 가만있으면 지낼 만은 합니다." 라고 주절대며 을이 을을 착취하는 풍경은 낯선 일이 아니다. 이 묵시록의 세계가 실은 우리가 사는 세계임을 인식할 때, 서늘한 깨달음이 지금이 바로 폭풍 직전임을 속삭인다.